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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작업노트

 미술을 하며 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결국 현실이라는 것에 내몰리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작업하는 것을 그만두고 회사라는 안정된 장소로 보이는 곳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곳은 내게 계속해서 불안을 주기만 했다. 회사에서 머무는 시간은 내 숨을 막히게 했다. 회사에 다니면서 몸 곳곳에 이상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스트레스성 어지럼증이 시작 찾아왔다. 출근을 하던 어느 날 지하철에서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공황장애의 초기 증상이라고 한다. 이 모든 상황을 바꾸고 싶었고 다시 작업이 하고 싶었다. 나는 어떤 안정을 느끼기 위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걸까? 정해진 시간에 회사에 나가 일하는 것이 못 견디게 불행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일정한 리듬에 맞춰 잘 살아가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회사 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데 그게 바로 나인 줄은 몰랐다. 남들은 다 잘 다니니까 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다니면서 유일하게 안정을 느끼는 것은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는 일이었다. 일을 하는 동안 매일 오후 3시쯤 창밖을 보며 자유로이 걸어 다니는 상상을 했다. 계단 몇 개만 내려가면 그 앞에 자유가 있지만 나는 계속 회사에 묶여 있었다. 스스로가 불확실함을 견디지 못해 회사에 발을 묶어 놓은 것이다. 회사에 들어갈 때보다 그만둘 때 몇 배는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공황장애 초기 증상을 경험한 뒤에는 더 이상은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매일같이 산책을 했다. 하루에 6시간을 걷기도 했다. 매일을 걸으며 마주하던 길거리 풍경들에서 나는 점점 안정감을 찾게 되었다. 흔한 동네의 풍경이지만 이 흔한 동네의 풍경이 그리고 한낮의 오후 시간에 걸어 다니며 산책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선택하는 것이 너무 어려운 세상이다. 매일 걸었던 동네의 풍경들을 눈에 담다 보니 자연스레 이 풍경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미술을 다시 시작하는 것에 있어 두려움이 있었다. 작가라는 정체성은 잃어버린지 오래되었고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조차 잘 인지되지 않았다. 예전에는 어떻게 작업을 했더라? 전에는 계속해서 연속성에 놓여 있어 그런지 이 작업을 하면 다음 작업이 자연스레 떠올랐고 떠오르는 대로 마음껏 걸리는 것 없이 작업을 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다시 작업을 하려고 하니 너무 어려웠다. 작업은 어떻게 하는 거더라. 그전에 예술이 뭐더라. 이런저런 생각들로 시간만 지나갔다. 그러는 사이 산책은 계속되었다. 산책을 하며 차츰 마음이 안정되어가면서 이러다가는 평생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내가 매일 보는 풍경이라도 그려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재료는 가장 쉽게 생각되는 크레파스에 종이였다. 어렵지 않게 느껴지는 편한 것들로 드로잉을 시작했다. 우선 시작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올 8월부터 본격적으로 드로잉을 시작했다. 그러다 3살 조카를 봐준 적이 있는데 3살 조카가 스케치북 위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는 해위가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였다. 사실 그림을 그린다고 말할 수 없는 행위였다. 그저 본인이 원하는 색을 골라 아무 형태 없는 낙서라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을 그려내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조카를 보다 보니 깨달음이 왔다. 맞아. 내가 하고자 했던 예술도 이런 거였는데. 우선 내가 즐거운 것. 의미를 떠나 시행할 때 어렵지 않은 것. 하지만 내게 작업은 어려운 것이 되어있었다. 그래서 더 쉽게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크레파스 색연필 오일 파스텔 등으로 산책할 때 느꼈던 자유로운 기분으로 드로잉을 했다. 여전히 예술가의 삶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나는 왜 평범하게 회사에 다니지 못했고 한낮의 길거리를 염원했는지를 생각하며 산책을 한다. 그리고 산책 중에 여기다 싶은 지점들을 사진을 찍어놓는다. 그것들을 집으로 가져와 드로잉을 한다. 쉽게 재미있게. 몰입이 될 수 있게. 계속해서 그리다 보니 알 것 같은 지점들이 생긴다. 맞아 내가 추구하던 가치관이 이런 것들이었지 하는 부분들도 생긴다. 점점 나를 찾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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